주목할 만한 국내 사진전

Look Back in Anger 4 <김은주 사진전>

초대일시 11.21(월) 오후 6시 30분

 

우리 시대의 다큐멘터리 사진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사진의 시원이자 근원을 이루고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은 끊임없이 시대의 흐름을 담아내고 사회의 담론을 만들어 왔다. 는 일찍이 영국 극작가 오즈번이 기성 사회의 위선과 물질문명 속에서 인간 부재와 상호소통의 단절을 지적했듯이, 시대의 목격자로서, 기록자로서 인간 중심이라는 기본적인 정신을 계승하면서 사회 부조리와 인간관계의 불합리와 모순에 분노할 줄 아는 작가에 주목하고자 한다.   김은주론 : 다큐멘터리 사진에서 기억의 문제   이광수(사진비평가, 부산외국어대 교수) 사진가 김은주의 ‘그’ 어머니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사진가가 당사자들을 그 현장으로 나와 일정한 포즈를 취하게 하여 찍은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사진가가 인위적으로 통제하고 연출하여 촬영한 사진이라는 이야기다. 이런 사진은 사진가가 시간은 물론이고 장소까지 치밀한 계산 속에서 특정하게 선택하는데, 특히 피사체의 배경이 여러 가지 계산 속에서 중요하게 세팅되어 촬영한다. 카메라와의 거리, 화각, 앵글 등은 물론이고, 톤과 같은 사진의 물성도 모두 사진가가 인위적으로 계산해서 찍는다. 그래서 엄밀하게 말할 때 이 사진의 피사체는 그 ‘어머니’겠지만, 좀 더 넓게 보자면 배경이 되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것은 주요 피사체인 자식 잃은 그 ‘어미’의 모습이다. 그 어머니의 모습은 외형적으로는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게 별로 없다. 40년, 50년이 넘은 시간 동안 자식을 앗긴 어미 얼굴에 파인 주름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깊고 크고 짙게 파이는 건 아니다. 그 박탈과 상실의 시간이 아무리 깊어도 그들을 적어도 겉으로는 다른 이와 다른 특별한 존재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저 그런 모습으로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여느 보통의 어머니일 뿐이다. 하지만 속은 겉과는 전혀 다르다. 국가가 자식을 앗아간 그 사건 이후의 시간을 어떤 형태로든 표식으로 드러내지 못했으니, 국가보다 더 무서운 이웃 공동체로부터 받는 의심과 조롱과 멸시의 시간이 그 안에 녹아 있다.   실체란 무엇인가? 겉인가, 속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겉과 속 둘이 함께 만들어내는 것이 실체다. 그리고 그 겉과 속이 만들어내는, 그 실체를 사진이라는 이미지로 드러내는 것이 다큐멘터리 사진이다. 겉은 여느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으니 다르지 않게 찍어야 하는 것이고, 속은 여느 보통 사람과 다르니 다르게 찍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런 연출된 사진을 역사성을 갖춘 사료 즉 다큐멘트로 해석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실체라는 것이 움직이는 동작만은 아니고, 그래서 움직이는 순간만 포착해내는 것이 실제를 재현하는 다큐멘터리가 아님은 더는 논란이 될 수 없다. 움직이지 않는 유물이나 땅속에 들어가 있는 유적조차도 역사의 실체를 드러내는 주요한 사료가 되는데, 속에 존재하는 역사성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 시간을 품은 인간이라는 오브제를 재현하여 보여주는 게 어찌 다큐멘트가 되지 못하겠는가?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사진가가 그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속을 어떻게 재현해야 그 지난 역사를 말해주는 것이 될 수 있을까에 관한 것일 것이다.   사진가 김은주가 이를 드러내는 방식 가운데 하나는 그 어머니를 일상의 옷을 입게 하는 것이다. 눈물은 아래로 떨어지지만, 밥숟가락은 위로 올라가는 그 잔인한 인간 생존의 시간을 보여주는 게 소위 일상성이고, 그 일상성을 잘 드러내는 코드가 평상복이다. 물론, 해마다 5월이 찾아오는 그 평상 아닌 평상의 옷 즉 상복도 포함될 수밖에 없다. 그 죽음이 그들에게는 일상이 되어버린 세월이었기 때문이다. 사진가는 그 평상의 옷을 입게 하고, 그때 그 장소에 나와 세상을 대면하게 한다. 그 장소는 내 자식이 죽은, 내가 낸 세금으로 국가가 내 자식을 죽인 곳이다. 그 모진 세월을 버텨온 그때 그 집도 있고, 내 자식이 묻힌 망월동도 있고, 도청 앞 광장도 있고, 통합병원도 있고, 교도소도 있다. 시간이 변하여 완전히 무화(無化)되어버린 듯 보이는 제주 돌담도 있고, 동네 어귀도 있고, 유채가 보이는 풍경도 있다. 사건은 죽음이 벌어진 곳으로부터 시작하여 지금 여기에 이르기까지 점을 넘어 선과 면으로 존재하기에, 그동안 살아온 궤적, 하나하나가 모두 현장이 되고, 그 역사의 현장은 사진가 김은주의 사진에서 모두 배경이 된다.   사진에서의 배경은 장소가 가지는 겉모습인데, 그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에 따라 달리 인식된다. 그것을 재현하는 것은 결국 주체의 문제가 되고, 그 배경은 객관적 항상성의 존재가 아니고 주체적 재현의 풍경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같은 장소를 찍더라도 그 대상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재현은 달리 나타나는 것이고, 그래서 그 풍경은 권력의 산물이 되는 것이다. 사진가는 우선 무엇을 선택하느냐의 문제에 봉착하게 되고 다음으로 그 선택한 장면으로 무엇을 말하려 할 것이냐의 문제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재현의 방식을 동원할 것인가의 문제에 접하게 된다. 즉 화면 구성을 어떻게 하고, 빛을 어떻게 이용하여 사진의 물성을 어떻게 드러내느냐의 문제는 무엇을 말하려 하느냐의 인식의 문제에 달린 부차적이라는 것이다.   김은주의 사진은 그 장소 위에서 시간이 만들어낸 겉과 속의 다름의 실제성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저 사진들을 보는 관람자는 저 피사체와 배경이 만들어내는 부자연스러운 이미지가 별다른 감동을 자아내지 못할 수 있다. 사진가가 아무리 드러내려 한다지만 그 속의 아픔이 쉬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시절을 겪은 사람은 쉬 고개 들 수 없는 어떤 찔림의 아픈 감정을 일으키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대중은 감각적인데, 재현이 감각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가가 흔들리는 것은 이 대목에서일 것이다. 감각적 대중의 코드를 따라가야 할 것인가? 아니면 좀 더 냉정하고, 무미건조하게 재현하여, 마른행주에서 물을 짜내도록 해 볼 것인가? 이는 전적으로 사진가가 내려야 할 결단이지만, 난, 개인적으로 후자로 가는 것이 더 작품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라 본다. 그것은 오로지 한 가지 이유에서다. 작품은 읽는 이의 감동에서 나오고, 감동은 보편적이지 않고, 작가가 만들어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다. 작품은 독자 주체적이어야 하고, 보편에서 벗어날수록 더 주체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라고 봐서다. 김은주 사진의 가치는 여기에 있다.   김은주의 제주 4.3과 광주 5.18 그리고 다르지만 결국 같은 아르헨티나의 그 어머니들을 여러 현장에서 찍은 사진들이 갖는 더 가치 있는 것은 또 다른 데 있다. 사진의 초기 역사가 보여준 바에 의하면, 19세기 말, 스튜디오 사진은 일정한 배경을 설치해두고 그것을 환상으로 소비하고자 하는 사람이 주체적으로 이용한 것이었다. 미국의 마천루나 영국의 템즈강은 사람들에게 근대와 자본주의의 꿈을 대신해서 꾸도록 만들어주는 장소였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 장소에 나타나 그것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연출 사진은 그 피사체의 적극성이 수반되어야 성사되는 일이다. 피사체로 찍히는 것보다, 그 피사체를 사진가가 어떻게 찍느냐는 것보다, 그 피사체가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진가가 아닌 피사체가 되는 주체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김은주 작업의 경우, 그러한 ‘나섬’이 갖는 가장 큰 의미는 그 어머니들이 단순히 정부와 대중에 대해 저항하는 차원에서 시위하고, 불의에 굴하지 않고 싸우는 단계를 넘어 개인의 실존적 뿌리를 갉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기나긴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려는 적극적인 몸부림을 사진 촬영이라는 행위로 실체화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은주의 사진은 재현한 결과물로서의 이미지가 갖는 작품성보다는 재현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그 의도에 부여해야 한다.   사진은 결과로서의 이미지로만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없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사진가가 그 어머니들을 역사에 대면하게 함으로써, 스스로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하려 한 것은 피사체가 주체로써 과거를 회피하지 않고, 기억하고 그 위에서 공동체가 그 죽음을 애도하게 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사진가는 그들을 현장에 나와 서도록 함으로써 그 상실을 인정하도록 하고, 그 위에서 이제, 과거에 집착하지 않도록 한다. 상실에 대면함으로써 우울(멜랑콜리)을 넘어 애도로 승화하는 길을 그들에게 열어주는 것이다. 결국, 김은주 사진 행위는 역사가 된 폭력, 그로부터 발생한 죽음의 상실이 갖는 현재의 의미를 반추하고 폭력과 죽음의 순환을 들추어내고자 하는 행위 예술이기도 하다. 죽음은, 사진가가 보여주듯, 기념되는 행위이다. 그것은 죽음 특히 국가 폭력에 의해 자행된 집단학살에 의한 죽음은 공동체의 존재 자체를 파괴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그 죽음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애도하여 공동체의 질서를 지키고자 한다. 그래서 죽음 이후 나타난 행위는 모두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다. 그 의미를 김은주는 단순한 무생물인 기념물을 찍은 게 아니고, 기억의 주체인 사람을 찍은 데서 더 깊게 찾을 수 있다. 이것이 김은주 사진의 가장 큰 의미다.   죽음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다큐멘터리 사진에서 특히 중요한 일이다. 죽음과 죽음으로 이끄는 모든 것에 대해 저항하고 반성하는 것은 다큐멘터리 사진의 본령이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과 사유에 대한 기록이다. 한국전쟁, 분단, 419와 516, 70년대 군사 독재와 80년 광주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죽음과 폭력, 희생을 경험해 온 속에서 죽음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사진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사진은 실제 사건이 아닌 기억의 재현으로밖에 죽음을 다룰 수 없다. 그러니 살아 움직이는 사건으로부터 생명력을 부여하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죽음과 그 시간 속에서 살아있는 것, 그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사건으로 존재케 하는 다큐멘터리 작업에도 깊은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그래서 김은주의 다큐멘터리는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삶이 동시에 존재하여 기억에서 애도로 이어지는 하나의 메타 사건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죽음을 기념하는 것은 곧 공식적으로 잊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잊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 안에서 이제 사적 기억은 모두 공적 기억에 포섭된다. 그러나, 사적 기억이 공적 기억에 자리를 온전히 내어줄 수는 없다. 김은주의 어머니들 사진은 바로 이 두 가지 속성을 재현한 것이다. 어머니들을 이미지로 남겨, 기억하기 위한 차원에서의 문화 장치이면서 동시에 이미지로 굳혀지면서 메타 기억은 사라지고 하나의 공식적 기억으로 굳혀지는 기억을 위한 망각과 망각을 위한 기억의 두 속성을 재현한 것이다.   오월어머니_2011/광주교도소   다시,봄_2018/그해 여름 노근리_ 2020...

2022-11-21 ~ 2022-11-30
서울시 중구 퇴계로 163
갤러리 브레송